Chapter 11
릴리스가 얼굴을 붉혔다.
이 짧은 문장으로 설명 가능한 현실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릴리스가…? 그 릴리스가??’
상상치도 못한 모습에 당황하기도 잠시.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한 느낌을 동반한, 불같이 강렬한 감정에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
동시에 사라졌던 이성이 돌아오며 내가 한 일을 돌이켜 보자.
‘….이런 미친?!’
폭풍처럼 휘몰아 치는 부끄러움.
아무리 호승심에 이성이 날아갔다고 한들,나 스스로 릴리스에게 입을 맞췄다고 생각하자 정수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니 애초에 호승심이 맞았나?’
내게 이성을 잃게 만든 그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과연 호승심이 맞을까?
입술에 남아있는 온기가 불로 지진 것처럼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힐끔 본 릴리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손의 틈 사이로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돼….안…참아야…..흐윽…”
뭔가 이상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뛰어오르는 심장을 꾹 눌러 내리며 릴리스에게 손을 뻗었다.
“저기…릴리스 괜찮-”
“거, 건들지 마!”
날카로운 외침에 내 손이 허공에서 멈춘다.
“지금은….내버려 둬…”
처음이었다.
부끄러워하는 릴리스도,
또한 내게 소리 치는 릴리스도.
모두 처음이었다.
“괜찮은 거예요…?”
“…힉….으..응….좀 놀라서…히끅…그런 거니까….어…..양치하고 올래?”
“어…넵..”
누가 봐도 나를 떨어뜨리기 위한 변명이지만, 위태로워 보이는 릴리스를 위해 순순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거울을 보자 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시선을 조금 내리자…
“…..후우…또야?”
—-
“하악…하악…..”
숨 쉬기가 힘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고막이 울리는 듯한 기분.
처음이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가져 본 것도,
또한 내가 이정도로 감정에 휩쓸린 적도.
모두 처음이었다.
“안 돼….참아야…흐윽..참아야 해…”
식탁에 널브러진 매끈한 알껍질에 비춰진 내 모습은 결코 정상적이지 아니었다.
새빨간 안광이 사방으로 비산되는 동시에 입가는 주체없이 흘러내리는 침으로 엉망이었다.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시선이 갔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가 들어간 화장실에.
“…아서.”
내 귀엽고 사랑스러운 계약자.
그가 처음으로 자의를 가진 채 나를 원해 왔다.
전에도 먼저 다가와 입을 맞춘 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식사 따위로 포장할 것이 아니었다.
내게 안겨오며 내 입술을 탐하는 그의 행동.
그의 말마따나 나는 이걸 도저히 식사라 볼 수 없게 되었다.
달궈진 몸이 애타게 떨렸다.
“…덮칠까? 지금 당장?….안 돼! 참아야 해 릴리스…..그런 해픈 여자처럼 보이긴..싫어…”
심지어 우리에겐 가족이라는 벽이 있다.
아무리 사이가 좋은 가족이라 한들 지금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는 없을 노릇이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
“…..아내도 가족 아닌가?”
그 번개와 같은 깨달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아내가 된다면……아서의 아내가…”
상상하는 것은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나에게 인사하는 성숙한 아서의 모습.
-다녀올게 자기야.
“허억…시..심장에 안 좋아…”
물론 외신의 심장이 이정도로 무리가 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의 폭풍에 거의 비슷한 기분은 느낄 수 있었다.
상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리며, 온몸이 행복한 감정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다.
“….그런 미래를 위해서….오늘 정도는……음…그래. 오늘 정도는 참을 수 있어.”
목표가 정해지면 남은 것은 들이 박는 것뿐. 다만….
“…일단 해소는 해야겠지?”
—-
릴리스의 당부를 실천하며 화장실에서 나온 나는 목도한 장면에 어이가 없음을 느꼈다.
“….릴리스?”
“응? 무슨 일 있었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릴리스는 당당하게 다리를 꼰 자세로 어디서 난 건지 모르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고귀함과 요염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이었지만, 나는 황당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와…그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뭐가?”
“그렇게 시치미를 뚝 떼시다니…”
부끄러운 것은 둘째 치고서, 처음 릴리스를 이긴 것 같았다.
그런데 저렇게 모른 척이라니…너무한 거 아닌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릴리스를 보니 정말로 방금 일이 없던 일인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고 이리 와서 이거 마셔볼래? 달달하고 맛있어.”
내게 손짓하는 릴리스를 살짝 째려보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살짝 뜨거울 테니까. 후후 불어서 마셔. 아니면….내가 불어줄까?”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하는 릴리스.
“네, 불어주세요.”
약간의 심술끼로 한 말인데 릴리스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잔 속 내용물을 불어주었다.
“후우…후우….자, 여기.”
잠시 찻잔을 노려보던 나는 이내 한숨을 푹 쉬며 표정을 풀었다.
그래. 내가 화내서 뭐 어쩔 수 있겠냐…
상대는 외신이다.
여기서 더 밀고 나갔다가 약간이라도 관계가 어긋나버리면 나는 그 즉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
차라리 이 관계가 유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으리라.
체념하고 잔을 들어올렸다.
“후릅….”
혀를 간지럽히는 달달함과 동시에 씁쓸함이 입 안에 퍼졌다.
“커피네요.”
“응. 커피야.”
의외로 평범한 커피였다.
물론 내가 여태껏 마셔본 커피 중에선 가장 맛있었다.
“식후에 마시면 좋다고 해서 한번 가져와 봤는데. 어때 마음에 들어?”
내 반응을 기대하는 릴리스에게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맛있네요. 되게 달달하고.”
“사랑이 담겨 있어서 그래.”
“푸흡! 켈록…..켈록…”
“어머, 미안해라.”
“쿨럭….릴..리스…켁….그런 말 갑자기 던지지 좀 마세요.”
어욱 커피가 코로 넘어간 것 같다.
“사실 황금의 벌꿀술를 한스푼 넣어서 맛있는 거야. 놀라게 해서 미안~”
….전혀 미안하다는 눈빛이 아닙니다만.
열심히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릴리스의 표정에 묘하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밥도 먹었겠다. 이제 뭐 할래?”
“네? 릴리스는 그…시, 식사 안해요?”
아, 방금 전 일이 생각나 말을 절어버리고 말았다.
“음……”
릴리스가 잠시 내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흠. 오늘은 괜찮아.”
“네? 진짜요?”
“응….”
뻣뻣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리는 릴리스의 모습에서 뭔가 어색함을 느꼈지만, 본인이 먹기 싫다는데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약간은 아쉬울…..나 지금 뭐래냐? 미친 거지 아주.’
“아서. 우리 소화도 할겸 산책하러 나갈래?”
“산책이요? 저야 좋죠.”
릴리스와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심지어 그게 평범한 가족들이 으레 한다는 식후 산책이라면, 릴리스와 처음으로 하는 건전한 활동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지…..그나저나 진짜 처음이네. 릴리스랑 건전한 일이라니….’
뭐랄까, 분명 지금까지도 나쁘지는 않았지만….이번에는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되었다.
다만 한가지 걸리는 것은.
“저…릴리스.”
“들킬까 봐 걱정돼?
예, 정확합니다.
…이러는데 마음을 읽을 줄 모른다고요? 거짓말 아냐?
“어, 네. 아직 동거 신청도 안했고…”
아카데미는 신청만 하면 동거가 허용된다.
대부분의 귀한 집 자제들은 수발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작자들이니까.
가문에서 데려온 메이드나 집사들이 주로 동거 대상이지만 아주 가끔 학생들끼리 동거를 신청하기도 한단다.
‘물론 아직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어쨌거나 동거가 가능은 하지만 우선 신청을 해야했다.
하지만 나는 릴리스와의 관계를 증명하기도 어려우니 일단은 보류중인 상태.
그런 상황에 누군가가 나와 릴리스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기라도 한다면…..나는 곧장 퇴학이겠지.
“걱정마. 내가 누구니?”
당당하게 가슴을 내미는 릴리스.
눈으로만 봐도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에 시선이 잠깐 팔렸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눈을 피했다.
“내가 말했지? 나는 밤의 여신이기도 하다고. 밤에서 나를 볼 수 있는 건 내가 허락한 사람들 뿐이야.”
역시 외신님이다.
마법으로 구현하려면 거의 총장님급 대마법사 정도는 되야 할텐데…그걸 저리도 쉽게 말하고 있다니.
“알겠으면 평생 받들어 모시라고~”
“네, 물론이죠.”
평생이라….
그 말에 문득.
불안감이 섞인 의문이 떠올랐다.
‘릴리스에게 내 평생은 어느정도의 의미를 가질까?’
—-
밖을 나와보니 이미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한치도 앞이 안 보여야 정상이겠지만, 아카데미 곳곳에 세워진 마법등이 켜져 산책을 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아카데미 산책 코스 중 제일로 뽑히는 기숙사 옆 공원을 거닐며 릴리스와 평범하게 수다를 떨었다.
….아니 내용 면에서는 그다지 평범하진 않았나?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평범한 축에 속할 거라 생각된다.
“왜 하필 고양이로 변했던 거예요?”
“드림랜드에는 고양이가 가장 흔한 동물이거든. 내 나름대로의 위장이었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라던가.
“책을 좋아한다고?”
“네. 뭔가를 읽고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그 과정이 너무 재밌어서요.”
“음…난 책은 별로. 애초에 읽을 기회도 얼마 없었지만.”
서로의 취향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솔직히 산책을 나서며 약간은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릴리스와 함께라면 평범한 산책도 조금….수위가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
다행히도 릴리스는 내 평범한 수다를 잘 받아주었고, 중간 중간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나를 웃게 만들었다.
“푸하하하! 진짜요?”
“그렇다니까?”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생 경험 해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따뜻한 일상.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마법등의 불빛에 의지해 천천히 공원을 거니는 느긋함.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된 것은 전부 릴리스 덕분이었다.
릴리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다음 이야깃거리를 생각해내던 그때.
-꼬옥
“!!!”
무언가 부드럽고, 따스한 것이 내 손에 쥐어졌다.
시선을 천천히 내려보자 새하얀 릴리스의 손이었다.
“리, 릴리스?갑자기 손은 왜….”
“그냥 잡고 싶어서. 왜, 부끄러워?”
나를 돌아본 릴리스가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은 것을 보아하니 내 얼굴이 많이 빨개진 모양이다.
“이미 더한 것도 많이 했으면서 뭘~”
너무도 맞는 말이라 반박할 여지도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릴리스의 손이 너무 부드러워서 내 쪽에서 놓아주기 싫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맞잡은 손이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서로의 손가락이 얽힌, 이른바 깍지를 낀 상태가 되어 있었다.
밀착한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부드러운 촉감. 그리고….
-두근…두근…
느껴지는 미약한 두근거림.
이 고동이 내 것인지 릴리스의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릴리스도 그곳에 집중하는지 말이 없어졌다.
기분이 오묘해지는 침묵 사이에서 나는 이상하게 불안함을 느꼈다.
산책을 나오기 직전에 떠올린 의문을 다시금 돌이켜 본다.
과연 내 평생이 릴리스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까.
외신인 릴리스는 당연히 영생을 살 것이다.
그녀의 평생은 나같은 평범한 인간이 감히 상상치도 못한 세월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의 평생은 너무도 보잘것 없는,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리라.
‘그렇다면, 이 손깍지마저…..릴리스에게는 사소한 일 아닐까?’
두려웠다.
내 평생이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까봐.
불안했다.
지금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사실은 내 착각에서 나오는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다만 이 의문을 직접 드러냈다가는 이 관계가, 이런 평화로운 시간이 깨어질까봐 두려워, 손으로 느껴지는 이 온기에 만족하며 다시금 평범한 수다를 준비할 따름이었다.
“릴리-”
“어? 거기 트롤 아니냐?”
다시 이야기의 포문을 열려던 그때. 마법등 그림자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트롤 맞네~ 어이!”
마법등 아래로 걸어나온 그는 아주 익숙한 얼굴이었다.
“안녕 루이스.”
루이스 골드썬
그는 내 동급생이자.
“안녕은 지랄. 트롤새끼 주제에 뭘 친근하게 인사하고 자빠졌냐? 역겹게 시리.”
아카데미 내에서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힌 금발 태닝 양아치 귀족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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