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4
열이,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머리가 뜨겁고, 어지러웠다. 아니, 아팠다.
감기에 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 얼굴에 붉은 열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내 얼굴이 지금 핏기 없이 창백해졌을 거란 사실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복을 입은 그 남자, 이천은 얼어붙은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그대로 서 교수를 부축한 채 집 안으로 향했다.
몸 뿐만 아니라 사고 또한 얼어붙은 것인지,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당장 내가 무슨 판단을 내려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채 판단을 내리기 전에, 안쪽에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도와줄 수 있겠나? 재학이 이 놈이 좀 많이 취한 모양이야. 자기 방이 어딘지도 말을 못하는군.”
당연하지만, 여기서 나는 도망갔어야 했다. 그게 올바른 판단이었다. 서 교수가 인사불성인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저 작자가 서 교수를 건드리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그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천은의 목소리는 내게 그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좋은 얘기도 하나, 들려줄 게 있다만. 자네가 살던 보육원 애기인데….”
소름이 돋았다.
그건, 적어도 이곳에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들어서는 안되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나올 거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나온 시점에서 더 이상 나에게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나마 마지막 남은 판단력으로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켰다.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에는 이천은이 여전히 서 교수를 부축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를 지나쳐 안쪽에 있는 서 교수의 방으로 향했다.
서 교수의 방은 잠겨있지 않았고 방 앞까지 온 이천은은 그대로 서 교수를 방 안의 침대 위에 눕혔다. 60대답지 않은 체력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와 이천은은 거실로 돌아갔다. 이천은은 마치 제 집이라도 되는냥 자연스럽게 거실에 놓인 서 교수의 의자에 앉았다.
“앉게나.”
나 역시 손님이고, 그 역시 손님일 터인데, 그는 이미 이 곳의 주인 같았다. 차마 그의 말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그대로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에서야 제대로 깨달은 일이었지만, 그의 이마에 작은 반창고 하나가 붙어있었다.
“뭐, 앉고 싶지 않다면 괜찮네. 그나저나 이 집은 손님에게 물 한 잔 내오지 않는건가?”
“…제 집이 아닌 터라.”
“농담이네.”
뻔히 알고 있을 터면서 괜히 찔러보는 불쾌한 농담이었다. 아니, 불쾌한 사람이었다. 이미 대화는 이천은의 페이스에 있었다. 더 상대가 말을 하게 놔둬서는 안되었다. 이천은이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보육원은… 보육원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좋은 이야기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 일도 아니네.”
“…무슨!”
“그냥, 요새 자금 사정이 어려워 보이길래 조금 기부를 했을 뿐이네. 자네처럼 훌륭한 작가를 키워준 곳인데 내가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당연히 내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한 바보는 아니었다. 이천은은 지금 내게, 네가 자라난 곳이, 자신의 영향 아래에 놓여있다고 얘기하는 것이었다. 구역질 나는 협박이었다.
“…대체, 대체 왜.”
“자네와 나 사이 아닌가? 별거 아니야. 앞으로도 그냥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목, 목적이 뭡니까.”
“목적이라니, 그런 건 없다네. 그저 순수한 선의일 뿐이야.”
이전과 별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여전히 그는 신사적이었다. 그러나 선의를 말하는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은 추잡한 독기 뿐이었다.
“요새, 많이 힘든가 보군. 우연히 소식을 좀 들어서 말이야. 이런저런 기사도 나왔던데, 이상한 열애설이라던가, 출판사와의 문제라던가….”
어째서 지금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구지예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나도 쉬웠다. 나를 노린 것은 이천은이었다.
“어째서… 왜 그러는 겁니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떨면서 묻는 그 말에 이천은은 작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톡하고 건드렸다.
반창고였다.
“…정말, 그거 때문에?”
떠오르는 기억은 그 날.
도망치면서 벌어진 일.
그 때 나는 들고 있었던 잔을 이천은에게 던졌고, 그는 그 잔에 맞고 뒤로 넘어졌다. 나는 그대로 도망쳤다.
“겨우?”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만, 그 잔은 분명 이천은의 머리에 맞았다.
“겨… 겨우 그거 하나 때문에?”
이천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명백했다. 이건 보복이다.
벌이었다.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힌 죄였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에 말이 떨렸다. 이천은이 슬며시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먼저, 먼저 했잖아. 당신이.”
“허허.”
“당, 당신이 먼저, 만졌잖아.”
구토를 하듯이 입에서 힘들게 꺼낸 그 비난을, 이천은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넘겨버렸다.
“무슨 소리인가? 미안하네만… 그 때 잠깐 쓰러지고 아무 기억도 없어서 말이지.”
“시치미 떼지마! 다, 당신이 내… 내….”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천은이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런 그 움직임에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천은의 그림자가 컸다.
“집이 참 넓구만. 힘들겠어. 이상한 스토커 같은 게 붙었다지? 그래도 다행이군. 이런 곳까지 누가 쫓아오기는 어려울 테니까.”
이천은이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나 역시도 한 걸음 뒷걸음질 쳤다.
두려움에 허덕이면서,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아는거야?”
“무엇이 말인가?”
“그 얘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어!”
내가 서 교수에게 얘기한 건 기자들의 얘기였다. 스토킹 같은 애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았다. 이천은은 대답하지 않고 그냥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더 이상 뭘 숨기려고 하는 생각조차 없는 듯 했다.
나에게 벌어진 모든 그 일은, 보복이었다. 이천은의 이마에 난 그 작은 스크래치에 대한 보복.
그러나 동시에 그건 사냥이었다. 몰아넣는 것이다. 구석으로. 천천히.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산 채로 붙잡아야 하기 때문에.
“왜… 왜 하필, 하필 나한테?”
어째서?
“자네는 어른이지.”
“어,른.”
“그래서야.”
그야말로 너무나도 단순한 논리였다.
나는, 설국은,
어른이었다.
그리고 어른과의 그것은, ‘합의를 한다면’ 범죄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참으로, 그럴 듯한 이야기였다.
이게 바로 이천은의 목적이었다.
이천은의 목적,
목적은,
내가 그의 말에 ‘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자네와 좋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네.”
“가, 가까이 오지마.”
이천은이 다시 한 걸음.
나도 한 걸음.
“최근 자네가 힘든 상황을 겪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만약 자네가 나를 도와준다면.”
두 걸음.
“간단한 일이야, 정말. 그럼 내가 충분히 도와줄 수 있지. 출판사라던가, 이상한 기사들, 스토커… 그리고 보육원까지.”
세 걸음.
“전부 자네가 해결할 수 있어.”
네 걸음.
“해결 뿐인가?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지.”
다섯 걸음.
“피를 흘리는 걸 보고 싶지는 않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그러나, 내 등 뒤에 닿는 것은 벽이었다. 이천은의 거대한 그림자가 내 몸을 덮었다. 그의 사람 좋은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천은의 한 손이 벽을 짚었다. 다리가 떨린다. 떨리는 다리가 점점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정말 쉬워…. 자네 또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이천은의 다른 한 손이 내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 손이 내 몸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결국 내 허리에 닿았다.
“여자란, 참 쉬운 생물이라고.”
과연 그 말대로였다.
여자란 참으로 쉬웠다.
쉽게 사는 생물이다.
그냥 이렇게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너무 쉬운 존재였다.
“쉬운 선택을 할 거라고 믿네.”
그러니까, 그건 이런 말이었다.
“…까.”
“응?”
“좆.”
“뭐?”
“까.”
무너지던 다리를 다시 일으켜 힘을 주었다. 그때, 이천은의 손은 내 엉덩이의 위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이천은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윽,으어억.”
이천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제 낭심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당연히, 나 역시 그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었다. 이런 몸뚱이로 로를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정도 밖에 없을 테니.
나는 즉시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생각은 없었다. 서 교수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달렸다.
달렸다.
그냥 달렸다.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다.
주변 풍경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건지, 어디에 있는 건지 아무 것도 몰랐다.
한참을 달렸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할 정도로 지쳤고, 너무 힘들어서 구토가 나올 정도로 지쳤을 때,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달리기를 멈췄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거리였다.
주변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벽에 몸을 기대고 헉헉 숨을 몰아쉬자 다시 생각들이 달렸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방금 한 선택은 그리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거기서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도망쳐나온다 한들 그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을 테니까.
그 곳은 어디 인적이 드문 골목길 같은 곳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숨겨진 방 같은 곳도 아니었다. 그곳은 서 교수의 집이었고 언제 누가 올지 알 수 없었다. 녹음이라도 하고 있을까봐, 말조차도 애매모호하게 뭉개던 그가 일을 벌일 곳은 아니었다.
내가 한 행동은 결국 그의 화만 돋구었을뿐이겠지. 이제 그는 전력으로 나를 응징하려 할 것이다. 보육원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스토커들이 또 나를 쫓을지도 몰랐고, 출판사에서 또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몰랐다.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따르지는 않더라도, 화를 돋굴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떤가 싶었다.
그냥 웃었다.
뭐 어때, 하고 웃어버렸다.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 작자가 제 낭심을 쥐어잡고 웅크리며 지은 그 우스꽝스럽고 병신 같이 한심한 표정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떠올랐기 때문에,
그래서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동시에 웃었다.
처음에는 작았던 그 웃음이 점차 제어할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계속해서 웃었다.
웃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웃었다.
가슴이 아프도록 웃었다.
나는 여자가 아니었다.
쉬운 선택은 할 수 없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설…국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매정하게도 이런 나를 한참이나 방치한 함예진이 있었다.
“괜,찮습니까?”
“아하하하. 괜,괜찮아요. 미안합니다. 웃음이, 웃음이 멈추지를 않네요.”
“….”
함예진의 얼굴이 참 볼만했다. 창백하고, 두려움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냥, 별 일 아니에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에요. 진짜 그냥 한심한 일입니다. 그냥…. 왜, 왜, 이렇게, 늦었어요?”
“…미안합니다.”
“하하하, 진짜 바보같다. 애초에 숨긴 내가 잘못이었는데… 이제 와서 당신 탓을 할 게 아닌데….”
“미안합니다.”
“진짜, 진짜… 왜, 늦은 거예요?”
“미안합니다.”
함예진은 바보 같이 같은 말만 반복했다.
“진짜, 웃겨요.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 들으면, 놀라 자빠질 걸요? 조금 표현이 진부하긴 한데, 진짜에요.”
“미안합니다.”
“내가, 그 양반, 그 새끼, 거시기를 확 차버리고, 어. 그 표정을 당신도 봤어야 했는데.”
“미안합니다.”
“왜, 그렇게, 계속 사과해요? 하하하, 진짜 웃긴 일인데 이거.”
“미안…합니다.”
“바보같아.”
어느 순간 함예진이 나를 껴안고 있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천천히 내 몸이 무너져내렸다. 나는 함예진의 몸에 매달린 채, 계속 웃었다.
계속 웃었다.
웃었다.
울었다.
아이처럼, 정말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그런 나를 함예진이 꼭 안아주었다.
꼭,
안아주었다.